경찰서에서 꽤 떨어진 한 병원. 로비부터 병실 곳곳까지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환자들을 급히 대피시키려는 보안팀과 간호사들이 수많은 노력을 들였지만 그 많은 환자들의 각기 다른 상태 때문에 전부 대피시키기엔 무리가 있었다. 아직 다른 곳보다는 안전하지만 곧 있으면 밖에 돌아다니는 괴물들이 닥칠 게 뻔하다.
이 와중에 한 병실에선 다른 사람들과는 비교적으로 침착히 있는 부부가 있었다. 여성은 침대에 누워 잠을 자고 있고, 그 옆에서 그녀의 남편이 아내의 손을 꼭 잡고 긴장한 채 앉아있었다.
“큰일이 났나 본데...”
바깥 상황도 걱정이지만, 이런 때에 깨어나지 못하는 아내가 더 걱정이 된다. 누워있기 시작한지 2년도 더 됐으나 전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아내가 못내 속상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런 감정도 잠시 뿐, 하루 빨리 아내가 깨어나기만을 바란다.
그러나, 아내를 걱정하다 문득 다른 생각이 들자 남자의 걱정은 더욱 커졌다. 다른 곳에서 무슨 큰일을 겪고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딸이 무사하길 기원했다.
“무사해라, 테린...”
허무하게 서장실로 돌아와서, 테린과 그웬 일행은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의견을 주고 받았다. 최종적인 목표는 이 지역에서의 탈출이지만, 지금 있는 인원 전부 무사히 빠져나가려면 차량이 필요하다.
“차부터 구하자. 차고로 가서 쓸 만한 차가 있는지 봐야겠어.”
테린은 차고에 내려가길 원했지만, 몇몇은 꺼리는 눈치다.
“그...차고로 가기 보다는 그냥 여기서 구난 신호를 보내서 헬기 요청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캐서린은 아까 경찰서 내에서 본 좀비로 변한 개를 보고 다시는 건물 안을 돌아다니는 것에 겁이 났다. 헬기장이 서장실 바로 위니까 헬기가 오면 그걸로 탈출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문제는...
“통신 신호가 지금 간당간당해. 아무래도 그건 무리일 거 같다.”
“말도 안 돼...”
무전기로 채널을 변경해가며 통신을 시도해 봐도 돌아오는 답은 전혀 없었다. 휴대폰으로 아무에게나 전화를 걸어보지만 급격히 낮아진 신호 감도 때문에 통화도 불가능한 상황. 차고로 내려가는 테린의 계획이 현재로선 최선일 것이다. 빌리도 총상으로 인해 위급한 상황이니 서둘러 행동해야 했다.
서장실로 올 때 이용했던 계단을 다시 이용하여 지하에 위치한 차고로 내려간 테린 일행. 이동하면서 아까와 같이 좀비들의 위협은 없었지만, 차고로 들어서자 차량 주위에 어슬렁거리는 좀비들이 보여 섣불리 들어갈 수 없었다.
“왜 차고에도 있는 거야...”
입구 가까이에 세워져있는 차량 옆에 몸을 숨기고 조심스레 살펴보지만,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좀비들이 신경 쓰이는 탓에 마땅한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한참을 둘러보다가 차량용 출구 쪽에 세워진 앰뷸런스를 발견하고 테린 일행은 그쪽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굶주린 괴물들이 먹이를 노리면서 움직였지만 운이 좋게도 주차되어있는 차량이 많았기에 들키지 않고 움직일 수 있었다.
“조금만 참아, 빌리. 괜찮을거야.”
“미안하다. 나 때문에...”
“그런 소리 마.”
빌리의 양옆에서 부축해가는 그웬과 캐서린은 어서 빌리를 치료해야겠다는 생각에 발걸음을 조금씩 빠르게 했다. 그들 앞에서 테린이 앰뷸런스 근처에 있는 차량 옆으로 가 주변을 살피곤 안전하다는 사인을 보냈다. 나머지 인원도 테린의 곁으로 가고 다시 앰뷸런스로 이동하려는 그 때.
우으으으어어어어어-
앰뷸런스 뒤편에서 무거운 신음소리가 나더니 터벅터벅 누군가가 앞으로 걸어나왔다. 힘없이 늘어진 손끝으로 피가 흘러 뚝뚝 떨어지고 피부 전체에 핏기가 없이 창백한...목의 살점이 너덜너덜 거리는 좀비였다. 테린은 바로 멈추고 앤리사를 그웬 쪽으로 보내고 그대로 가만히 괴물의 동태를 살폈다. 그 괴물은 잠시 앰뷸런스 앞에서 주춤거리며 멈추더니, 테린을 보자 천천히 그녀 쪽으로 움직였다. 이제 코앞인데...다른 곳에 유용한 차량은 없나 살폈지만 그리 적절한 차량은 찾을 수 없었다. 테린과 좀비의 거리가 20걸음 남짓 남았고, 다들 어찌할 줄 모르고 있을 때...
키야아악-!!
짐승이 울부짖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나고 그와 동시에 좀비의 오른쪽에 세워져있던 차량 사이로 거대한 무언가가 튀어나오자, 좀비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머리가 먼저 땅에 떨어지고 곧이어 몸도 쓰러졌다. 좀비가 쓰러지면서 나타난 거대한 짐승과 같은 그것은, 악어의 가죽과 같은 피부를 지니고 팔이 아주 길어 서 있으면서도 손이 땅에 닿을 정도였고 손끝에 날카로운 면도날과 같은 손톱을 가지고 있었다. 그 손톱에선 지금 피가 떨어지고 있어서 좀비를 해치운 게 이 괴물인 것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키는 딱 봐도 일반 성인 남성보다 컸기 때문에 그 거대한 모습에서 나오는 위압감으로 인해 테린은 더더욱 움직일 수가 없었다. 거기다 그 괴물은 손톱의 날을 더욱 세우고 테린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죽는다...!!’
어떤 때보다도 생명의 위협을 절실하게 느낀 테린이지만 공포감 때문에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거릴 좁혀오는 괴물에게서 멀어지려고 애썼지만 어느새 둘의 거리가 몇 걸음도 되지 않아 팔만 뻗어도 닿는 거리가 됐다.
크에에-엑!!
다시 한 번 날카로운 외침을 날리며 괴물이 달려들었다. 거대한 덩치와 다르게 그 속도는 마치 발사된 총알과 같이 눈에 겨우 보일 정도로 재빨랐다. 괴물은 정확히 테린의 머리를 노리고 팔을 크게 휘둘렀다.
“아악!”
테린은 오직 살아야한다는 의지로 가까스로 몸을 던져 괴물의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어깨 쪽을 손톱으로 긁혀 찢어진 옷과 그 사이로 피가 새어나오고 있다. 상처를 붙잡고 뒷걸음질 치는 그녀를 천천히 고개를 돌려 노려보는 괴물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댔다. 손톱을 더욱 세우고 이번엔 반드시 죽이겠다는 것처럼 다시 다가가는 괴물. 거리가 다시 가까워진 순간, 팔을 들어올려 내리치려는 그 때 옆에서 빠르게 달려온 승합차가 괴물을 쳐 10M 가까이 날려보냈다. 상황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멍하니 쓰러져있던 테린은 바로 앞에 선 차량에서 내려 자기 앞에 다가와 손을 내미는 누군가를 보곤 그제서야 안도할 수 있었다.
“...티...팀장님...?”
“뭐하고 있어? 어서 손잡고 일어서.”
여러 생각이 스쳐갔지만 우선 바로 앞에 있는 손을 붙잡고 일어선 테린은 윌 팀장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경찰서에 왔을 때부터 전혀 보이지 않아서 무슨 일이 생긴 줄 알았지만 자신의 눈앞에 떡하니 서있는 걸 보곤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죽은 줄 알았잖아요!!”
안도함과 동시에 놀랐기 때문인지 울면서 주먹으로 윌의 가슴을 강하게 두들기는 테린. 정말로 강하게 때린 탓에 맞을 때마다 억억 소리가 절로 나오는 수준이다.
“자...잠깐...너 때문에 죽겠다...!”
“연락을 했어야죠! 진짜로 죽은 줄 알았다구요!!”
“우리도 연락을 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그럴 수가 없었어. 미안하다.”
우리? 윌의 말에 테린은 두리번거리다가 윌이 타고 있던 차의 조수석 창문이 내려가면서 제이시가 손을 흔드는 걸 보며 바로 이해했다. 윌과 제이시는 경찰서에서 자신들 나름대로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방금 전까지 다가오지 못하던 일행들도 와서 윌과 제이시를 반갑게 맞이했다.
크르륵-!
좋은 때도 잠시. 잊고 있던 녀석이 다시 일어서서 테린 일행을 보며 이빨을 갈기 시작했다. 일행이 그 모습을 보고 느낀 건, ‘이빨도 손톱만큼 날카로운 듯’...
“어서 차에 타!”
윌과 테린 일행은 서둘러 윌의 차에 탑승했다. 바로 출발하려고 윌이 가속 페달에 발을 올렸지만 가로막고 있는 괴물 때문에 나갈 수가 없었다.
“저자식 좀 치워!”
팀장의 불만 섞인 외침에 테린은 곧바로 창문을 내리고 권총으로 괴물에게 총격을 가했다. 그러나 역시 조그만 상처만 났을 뿐 끄떡도 하지 않고 괴물은 포효를 하며 다시 달려들었지만 그 포효하는 순간에 벌어진 입속을 다시 사격해 관통시키면서 괴물은 차 바로 앞에서 드디어 쓰러졌다. 괴물이 쓰러지자마자 바로 윌은 가속 페달을 힘껏 밟아 괴물을 짓뭉개며 경찰서 차고를 빠져나왔다.
“후우...”
차고에서 나와 도로로 들어오자 누구랄 것 없이 다들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가 지나가는 게 마치 일주일 지나간 듯 느껴지는 게 이런 것이겠지. 계속해서 벌어지는 격한 일들이 일행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주고 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생존자 수가 늘어나긴 했지만, 탈출하기 전까진 안심할 수가 없었다.
“너희들하고 만나서 기쁘다. 이렇게 경황도 없는 때에 다들 잘 버텼군.”
“팀장님이야말로...살아계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그런가...왠지 나만 살아남은 것 같은 기분이라서 그리 좋진 않아.”
윌은 진지하게 자신이 살아남은 것이 과연 잘한 것일까, 의문을 품었다. 사태가 벌어졌을 때 그는 다른 경찰서 인원과 함께 필사적으로 경찰서를 방어했지만 순식간에 입구가 뚫리고 아수라장이 되는 과정에서 제이시와 같이 무기고로 피신해 문을 잠그고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렸다는 것이다. 그 일 때문에 자신의 행동에 대한 죄책감이 들었다.
“누구라도 그런 상황에서 그랬을 거예요. 팀장님이 잘못한 게 아니에요.”
조수석에 타고 있던 제이시는 그런 윌을 비난하지 않고 다독였다. 바로 앞에서 죽음이 몰려오는데 제정신 붙잡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살고자 하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라고, 본능을 거스르는 건 힘든 일이라고 제이시는 계속 윌을 위로했다.
“네게 그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군.”
“저도 이런 말을 해드릴 줄은 몰랐어요.”
“...고마워.”
앞자리에서 서로 낯간지러운 얘기가 오가고, 뒷자리에서는 다친 빌리를 보살피는 캐서린과 앤리사가 걱정스러운 듯이 있었다.
“선배님...”
“너무 걱정하지 마. 다 잘 되겠지.”
“피를 너무 흘리셔서...빨리 치료해드려야 하는데...”
“아직은 멀쩡합니다. 바보 같은 모습 보여드려서 부끄럽네요.”
농담을 할 수 있는 걸로 봐선 그리 심각한 부상은 아니지만 피가 조금씩 흐르는 상태가 좋다곤 보기 힘들었다. 윌도 그걸 알아챈 듯 목적지를 근처에 있는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하고 운전을 했다.
“우선 빌리부터 치료해야겠다. 여기서 좀 떨어진 곳에 주립병원이 있었지, 아마?”
“있기는 한데, 치료를 부탁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네요.”
“약이랑 도구만 있으면 어떻게든 될 거야.”
“...그거 엄청 무책임한 발언인 거 아시죠?”
“죽기야 하겠냐.”
테린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주립병원에 입원해 있는 테린의 부모님이 생각났다. 병원에 도달하면 우선 부모님께 가서 무사한지 만나러 갈 생각이다. 하지만 차가 병원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아수라장이 되어가는 거리를 보면서 걱정은 산더미처럼 불어나고 있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테린을 보곤 그웬이 옆에서 감싸주며 괜찮을 거라고 다독였지만 걱정은 쉽게 떨쳐낼 수 없었다.
“어라?!”
설상가상으로 차량의 기름이 거의 바닥나버리는 바람에 언제 시동이 꺼질지 모를 상황이었다.
“하필 이럴 때!!”
“주유 좀 제 때 제 때 하셨어야죠!!”
“넌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하고 싶니?”
예상치 못한 일에 다들 당황하고, 우려했던 대로 시동이 멈춰 도로 한복판에 서버린 차가 야속한 윌은 다시 시동을 걸어보지만 요란한 시동음만 들릴 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걸어가야겠네...”
차를 버리고 가는 게 아쉽지만 그래도 지금 있는 곳에서 병원이 보일 정도로 병원과 가깝다는 게 다행이었다.
“그나마 멀리 걸어갈 필요는 없겠네요.”
“서두르자. 얼마 안 남았어.”
일행이 일제히 차에서 내려 빠르게 병원으로 이동하자 길목 곳곳에서 누워있거나 서성이던 좀비들이 하나둘씩 기어나와 그들을 먹이로 삼으려고 따라갔다.
“조...좀비들이 쫓아와요!”
“무시해! 최대한 빠르게 병원으로 들어간다!”
5분 정도 달리자 병원 입구가 보여 재빨리 들어가는 일행. 윌은 우선 입구의 셔터를 내릴 버튼을 찾기로 했다. 로비로 가서 데스크 의자 뒤쪽에 있는 뚜껑을 열고 셔터를 내리는데, 제이시가 급하게 소리쳤다.
“팀장님! 빌리하고 캐서린이 아직 오지 못했어요!”
“뭐?!”
“앤리사!”
문 밖에서 힘겹게 달려오는 빌리와 그를 부축하는 캐서린과 앤리사, 거기에 저만치 뒤에서 그들을 향해 몰려오는 무시무시한 좀비 대군을 보고 테린은 곧바로 문을 벅차고 달려나갔다.
“테린! 위험하다!”
“제가 나가겠습니다!”
그웬도 테린의 뒤를 따라 부리나케 뛰어나가자 윌은 왠지 모를 두려움이 엄습해오는 것을 느꼈다. 설마...또 나만 살아남는 건가...?
“이런, 제기랄!”
불편한 몸으로 최대한 빨리 달리려고 노력했지만 빌리는 더 이상 한계인 듯 몸이 점점 늘어지는 걸 느꼈다. 무거워지는 몸을 견디지 못하고 금세 쓰러지고 부축하던 캐서린과 앤리사는 빌리의 상태를 확인했지만...
“이런...상처가 벌어졌어요...”
“아무래도...난 여기까진가 봐...”
“아녜요! 할 수 있어요! 조금만 더 힘을 내요!”
두 여성이 빌리의 몸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몸에 힘이 다 빠져버린 사람의 몸을 일으키는 게 최선이고 달리게 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나...나는 여기 두고...어서 가세요...!”
“그럴 순 없어요! 가도 함께 갈 거예요!”
지금으로선 짐짝에 불과한 자신을 버리고 가길 바란 빌리였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그녀들은 포기하지 않고 조금씩이라도 그를 움직이게 도왔다. 미안한 마음에 어쩔 줄을 몰라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다시 한 번 힘을 내기로 하여 더욱 속도를 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벌어진 상처가 욱신욱신 거렸지만 또 한 번 주저앉을 수는 없었기에 이를 악물며 고통을 견뎌냈다.
잠시 뒤 도착한 테린과 그웬은 빌리의 이동을 도왔다. 그웬은 빌리를 등에 엎고 병원으로 달려갔고 테린은 권총을 꺼내들어 어떻게든 좀비들의 행진을 저지하려 했다. 빌리와 그웬, 그리고 캐서린과 앤리사는 병원 문에 가까스로 들어가 빌리를 로비에 배치된 넓은 의자에 눕혀놓고 밖에서 테린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테린은 좀비의 수를 조금이라도 줄여놓을 생각으로 계속 사격을 감행했다. 어떤 좀비는 다리를 맞춰 쓰러트려 뒤에 오던 좀비들을 줄줄이 쓰러트리게 만들고 어떤 좀비는 머리를 맞춰 바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녀석들의 숫자는 폭설에 제설한 듯 전혀 줄어든 느낌이 들지 않았다. 테린의 당도가 늦어지자 그웬은 문을 열고 그녀를 재촉했다.
“그만하고 어서 들어와!”
마침 총알도 떨어져가고 더 이상은 총알 낭비일 뿐이라 생각하고 바로 병원 문으로 달렸다. 그웬은 달려오는 그녀를 보고 윌에게 셔터를 내릴 것을 부탁하고 계속 그녀가 뛰어오는 것을 지켜봤다. 입구만 보며 정신없이 뛰던 도중, 테린은 무언가가 자신의 발에 걸리는 느낌을 받으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버렸다. 달려오는 길목에 누워있던 좀비가 테린의 발을 손으로 붙잡고 있던 것이다.
“젠장...!!”
잡혀있는 발을 흔들고 다른 발로 좀비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쉽게 떨어지지가 않고 마음은 더욱 다급해져갔다. 그웬은 그걸 보고 윌에게 셔터를 멈춰달라고 하고 다시 밖으로 뛰어나갔다.
“떨어져라, 좀...!!”
총을 쏘려고 했지만 총은 쓰러지면서 손에 닿지 않는 거리까지 떨어져버려서 맨손으로 해결해야하는 상황. 끝까지 놓지 않으려는 좀비의 손과 머리를 차고, 차고, 또 차서 간신히 뿌리친 테린은 잽싸게 일어나서 다시 병원으로 향했다. 그러다 한 번 들어본 적이 있는 날카로운 외침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보자, 아까 경찰서 차고에서 봤던 그 덩치 큰 괴물이 그녀의 바로 앞에서 팔을 테린 쪽으로 쭉 뻗고 있었다.
“...크흑!!!”
“테린!!”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에 지켜보던 사람도, 당사자도 놀라 당황하기는 마찬가지. 그웬이 빠르게 달려갔지만 테린은 이미 복부를 꿰뚫려 난생 처음 겪어보는 고통으로 정신이 금세 아찔해지고 입으론 피를 토해내고 있었다.
“아....아아....”
말도 나오지 않는 고통. 복부를 관통해 등으로 빠져나온 팔을 부여잡고 간신히 나오는 신음소리를 내며 저항했지만 근력의 차원이 다른 괴물의 팔은 쉽게 테린을 놓아주려하지 않았다. 정신을 놓치지 않으려 했으나 배가 갈라지는 고통, 척추가 끊어진 고통, 몸 속의 장기가 갈갈이 찢기는 고통...이 여러 가지 고통들이 섞여 테린을 괴롭혔다. 마무리를 지으려는 듯 괴물은 다른 팔을 들어 올려 손톱을 치켜세우고는 아까와 같이 그녀의 목을 노렸다. 괴물의 팔이 휘둘러질 찰나 그웬이 총을 뽑아들어 괴물을 향해 발사했지만 일부가 상처만 냈을 뿐 저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총알이 떨어진 그웬은 망연자실하여 눈앞에서 벌어지는 살육을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테린...!!”
키에에에에에에에엑-!!
이리도 허무하게 가는 건가...테린도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이젠 저항할 힘도 남아있지 않아 몸을 축 늘어트리고 있는 그 때.
탕-!!
권총 발사음보다 훨씬 큰 총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고 어디서 날아온 건지 거대한 총알이 테린을 죽이려던 그 괴물의 관자놀이 부분을 한순간에 사선으로 관통하여 해치워버렸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웬은 바로 괴물의 팔에 꿰여진 테린을 빼내려고 했지만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녀를 보고 쉽사리 빼내주지 못하였다.
“야...정신 차려...! 이런데서 죽으면 안 돼!”
“...그....웬......쿨럭!!”
뭔가 말을 하고 싶은 그녀였으나 숨이 평소에 몇 배는 더욱 차올라서 말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고 대신 복부에 차 있는 피만 식도를 타고 올라올 뿐이었다.
“....너....라도.....빨...리.....”
“말 하지마...그대로 있어. 내가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줄게.”
그웬은 어떻게서든 그녀를 빼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계속 고통스러워하는 그녀를 보기가 매우 힘들어서 이도저도 못하는 신세였다. 병원 내에 있던 일행들도 그들을 돕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이미 다가올 대로 다가온 까마득한 좀비들 때문에 쉽사리 나갈 수가 없었다. 그웬도 바로 앞까지 당도한 좀비들을 보고 이젠 끝인가 싶었을 때 머리 위에서 로프가 여러 줄 자신의 주변으로 내려오곤 로프를 타고 사람들이 내려와 여러 가지 화기로 좀비들에게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일사불란한 움직임으로 테린과 그웬을 감싸고 다가오는 적들을 공격했다. 마지막 로프에서 다른 한 명이 내려오고 그 사람은 테린에게 다가와 가슴에 달린 검집에서 컴뱃 나이프를 꺼내 괴물의 팔에 힘껏 내려쳤다. 한 번에 잘린 괴물의 팔을 테린의 복부에서 조심히 빼내고 그녀를 들어 안은 그웬은 윌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윌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끝내 셔터를 내려 병원의 입구를 봉쇄시키기로 한다. 천천히 내려오는 셔터를 뒤로하고 자신들을 구해준 사람들의 보호 하에 그웬은 테린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어디서 왔는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그 사람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대원에게 병원의 또 다른 입구를 조사하게 시켰으나, 유용한 입구는 방금 닫힌 그 건물 입구 하나여서 당장은 진입이 어렵다고 했다.
“우선 주변 건물 중 안전한 건물 하나를 목표로 삼고 거기까지 호위한다.”
대장의 지시에 대원들은 각자 자신의 맡은 바 임무를 철저히 수행했다. 맨 앞에 서서 가끔 나타나는 장해물을 처리하는 대원이 있는 가하면, 가운데에서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호위하는 대원도 있고, 뒤에서 오는 적을 저지하는 대원도 있었다.
“누군진 모르겠지만 고맙습니다.”
“.......”
그웬은 그 대원들의 대장에게 고맙다고 감사를 표했지만 그는 들은 체 만 체 주변을 경계하기만 했다. 일단은 가만히 그들의 유도 하에 테린을 데려가기로 하고 말을 아꼈다. 그들이 다다른 건물은 2층짜리 가정집이었다. 선발대가 문 주위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한 후 진입하여 건물 내에 위협이 없는지 확인했다.
“이상 무!”
안전 확인이 끝난 뒤에야 다른 대원들과 그웬은 안으로 들어가 테린을 편하게 눕힐 만한 곳을 찾았다. 다른 대원들은 건물의 2층에서 재정비와 주변 경계를 하고 그웬은 1층에 마침 3인용 소파가 있어 그녀를 눕혀놓고 상태를 살폈지만, 희망이 없어 보였다. 뚫린 복부로 피를 너무 흘린 바람에 온 몸이 창백해진 그녀는 금방이라도 죽을 것같이 숨을 헐떡였다. 숨을 쉴 때 나는 소리도 피가래가 끓는 소리로 요란했다.
“테린...”
힘없이 늘어져 있는 그녀의 손을 꼭 잡는 그웬. 잡고 있는 그녀의 손마저 얼음장처럼 차가워 어찌하지 못하는 그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했다.
“이대로 가다간 과다출혈로 쇼크가 올 겁니다. 손을 쓰기엔 늦은 것 같습니다.”
곁에서 지켜보던 대원 중 한 명이 가망성을 바라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웬도 알고는 있다. 알고는 있지만, 쉽게 보내 줄 수가 없어 계속 손만 붙잡고 있었다.
“난...살지 못 할.....것.....같아...”
떨리는 입으로 조금이나마 말을 건네려는 테린이지만 그웬은 그 말조차도 듣기가 괴로웠다.
“난...놔두고...가.....그웬....”
“말 같지 않은 소리 하지 마! 누가 널 버리고 간대!”
“....그웬.....”
“그러니까....그런 소리 하지 말란 말이야...”
그웬은 계속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고 했으나 결국 감정에 북받쳐 눈물을 흘리고 만다. 잡고 있는 손에 얼굴을 갖다 대고 끅끅 대던 그를 보며 테린은 조금씩 희미해져가는 정신에 눈이 감기고 있었다. 이제 끝인가 보구나...조용히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진 것처럼 테린은 숨을 내쉬는 소리조차 없이 가만히 있었다. 그웬은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봤지만 이미 숨이 멎어 의식불명 상태가 되어있었다.
“테린!!!”
가까운 사람을 잃는다는 것이 이토록 슬픈 일이었을 줄은...그웬은 한없이 밀려오는 슬픔에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한편으론 같은 경찰서 동료였고, 한편으론 자기가 마음 속 한 구석에서 사랑하던 사람이 자신의 앞에서 죽어버린 게 이번이 처음이고 그 충격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몇 시간이 지난 얼마 뒤. 테린이 있는 건물에 누군가가 찾아왔다. 하지만 그 건물엔 이전까지 같이 있던 그웬이나 다른 사람들은 흔적도 없고 오로지 테린 만이 소파에 누워있을 뿐이다. 검은색 정장에 멋들어진 갈색 바바리코트를 걸친 그 남성은 테린의 앞에 서서 물끄러미 그녀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구나. 너나 네 어머니인 그녀나.”
테린을 아는 듯이 말하던 그는 한 손을 들어 올려 쫙 펴고 입으론 무언가 주문 같은 걸 외는 동시에 다른 한 손으론 그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의식을 행했다. 그러나 의식을 행하던 남자는 잠시 오묘한 표정을 짓더니 의식을 멈추고 일어서서 건물을 걸어 나갔다. 품에 넣어둔 담배 하나를 입에 물고 손가락 끝으로 불을 내서 한 입 들이마시곤 웃음을 지어냈다.
“저 집안은 정말 운이 끊이질 않는군. 부러울 정도야.”
입에 담배를 문채로 뒤를 돌아 건물 안을 보고선 씨익 웃더니, 남자는 그대로 희미해져가면서 마침내 사라졌다.
“뭐, 덕분에 내가 귀찮지 않게 됐으니 잘 됐네, 잘 됐어.”
그 시각 테린은 알 수 없는 곳에 홀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바닥이 있어보이진 않지만 발을 디딜 수 있고 주변은 끝이 없는, 대신 안개가 자욱한 이상한 공간이었다. 테린은 이 기묘한 곳에서 누군가가 같이 있는 걸 느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당장은 아무도 없었지만 바로 앞에 안개가 서서히 걷히면서 한 여인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테린과 닮았지만 달랐으며 지금은 병실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어야 할 테린의 어머니인 아이리스였다.
“엄마?”
테린은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라 확신하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꿈인 듯 아닌 듯 생생하지만 그렇다고 자기가 살아있는 게 아니란 건 잘 알고 있어 헷갈려했다. 딸이 가까이 다가오자 어머니는 딸을 살며시 자신의 품으로 안고 갓난아기 다루듯 등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우리 딸 고생이 많네.”
아이리스의 첫 마디에 쑥스러운지 테린은 수줍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볼을 살살 긁었다.
“그런데 우리 딸. 아직 갈 때는 안 된 것 같네?”
“...네? 그게 무슨...”
아이리스는 안고 있던 테린을 앞에 세우고 빤히 딸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환하게 웃어보였다. 뒤이어 테린과 아이리스의 사이가 멀어지면서 주변의 공간이 그녀들의 가운데부터 갑자기 어두워지는 것이었다. 손을 뻗어 멀어져가는 아이리스를 잡으려고 했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엄마...? 엄마!!”
어머니와의 거리가 매우 멀어져서 이젠 보이지 않을 정도가 됐을 때, 그녀는 깊은 어둠 속에서 혼자 허우적대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다가 평소 잠에서 조금 깬듯한 느낌을 받아 바로 눈을 뜨며 일어났다. 몇 시간 숙면한 듯 상쾌한 기분. 분명 자신은 얼마 전에 치명상을 입고 죽어가던 중이었는데,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깨어나다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다. 더군다나 그 치명상을 입은 자리인 복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작은 생채기 하나 없이 멀쩡했다. 손으로 계속 더듬으며 살폈지만 정말 다쳤던 사람이 맞나 의심을 할 정도였다.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아직도 꿈인가 했지만 옷은 꿰뚫린 모양 그대로 찢겨진 걸로 봐선 꿈은 아닌 거 같고, 어렴풋이 기억나는 의식을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 건물에 그대로 있는 것으로 보아 지극히 정상적인 상태로 보였다. 죽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어떻게 되살아났는지, 정말 기적이라도 일어난 건지, 천사라도 왔다 간 건지...별에 별 생각을 다하는 그녀였지만 일단은 그런 생각은 접어두고 다른 일행들과 다시 합류해야겠다는 생각에 건물을 나서기로 한다. 그렇지만 우선...
“아무리 이런 때라도 옷은 제대로 입어야지...”
찢어진 옷 끝으로 살며시 보이는 가슴 아랫부분 때문에 민망한 느낌이 들어 이곳에 옷장 같은 것이 있나 찾아 나섰다. 1층 입구 바로 앞에 있는 방에 세워져 있는 옷장을 발견하고 거기서 찢어진 점퍼와 셔츠만 옷장에 걸려있는 옷으로 갈아입고 밖을 나섰다.
무턱대고 밖을 나왔지만 이곳에 어떻게 왔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그러다 해가 비추는 곳 반대편을 보니 주립병원으로 향하는 이정표가 보여 발걸음을 그쪽으로 옮겼다.
“다들 무사해야 할 텐데...”
병원으로 가는 길은 여전히 아수라장이었다. 유리창이란 유리창은 전부 깨지고 마네킹이 이리저리 나뒹구는 옷가게도 보이고 불 때문에 전소되어 까맣게 그을린 차들, 그 안에서 같이 타죽은 시체까지 어딜 가나 난장판이 아닌 곳은 없었다. 그런 것들이 테린의 마음을 계속 애태우게 만들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걸음을 재촉하던 그녀는 어느 차량 정비소 앞 삼거리에서 멈추고 다시 주변을 살폈다. 이정표가 가리키는 방향은 정비소 맞은편이었지만, 그쪽은 좀비 몇 체가 서성이며 아직도 먹잇감을 찾아다녔다. 지름길을 놔두고 자신이 온 길 말고 다른 길을 가려고 했으나 그 길에도 금방 좀비들이 막아서기 시작했다. 테린은 좀비에게 둘러싸이기 전에 나가기 위해 우선 총을 꺼내들으려고 허벅지에 채워진 건 홀더에 손을 가져다댔다.
“........맞다........”
총은 어제 밤에 쓰러지면서 떨군지 오래란 걸 잊고 무의식적으로 총을 들으려고 한 자신이 원망스러운 그녀였다. 좀비들은 기어이 그녀와의 거리를 몇 M도 안되게 좁혀왔고 곧 있음 그녀를 포위하여 그녀의 몸으로 만찬을 즐길 예정이었다. 테린은 하는 수 없이 등 뒤에 총과 함께 매일 매고 다니는 합금제 톤파를 하나 끼고 바로 앞에서 다가오는 좀비 하나의 안면에 그대로 후려갈겼다.
퍽-!!
둔탁한 소리가 울려 퍼지자, 테린의 팔이 있는 곳엔 좀비의 머리는 온데간데없고 대신 저 멀리 길바닥에서 데구루루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냥 한 대 쳤을 뿐인데, 아무리 합금제 톤파로 쳤어도 사람 머리가 일반 사람의 힘으로 그리 쉽게 날아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던 그녀는 계속해서 다른 좀비들을 맨손으로 해치우기 시작했다. 이번엔 맨주먹으로 좀비의 턱을 아래에서 위로 가격하자 목이 뒤로 확 꺾여서 그대로 좀비가 쓰러졌고, 다른 좀비에겐 훅으로 광대뼈 쪽을 가격하니 목이 180도로 회전하여 양 팔만 앞으로 휘휘 젓고 있었다. 다른 좀비들도 마찬가지로 오로지 ‘맨손격투’로 처치하고 쓰러진 좀비들 가운데에서 그녀는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자신의 몸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혹시나 자기 자신도 저 괴물들과 똑같이 변해버린 것인가. 그녀는 자신에 대해 공포감을 느꼈다. 정비소 안에 들어가 거울을 찾아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그녀는 언뜻 봐서는 일반 사람이지만 혹여나 자신도 괴물처럼 변해버리지 않을까 걱정했다.
“이건 대체...”
자신이 이렇게 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기로 한다. 왜 몸이 그렇게 큰 치명상을 단숨에 회복하고, 온 몸의 근력이 증가하게 된 것인지를.
“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그 시각, 병원 1층 로비에선 윌이 저절로 감기는 눈을 억지로 버티며 입구 기둥에서 앉아있었다. 밤새 혹시 모를까봐 불침번을 자처해서 보초를 섰지만 더 이상은 무리인지 고개까지 꾸벅꾸벅 떨구며 졸기 시작했다. 다른 일행들도 불안함과 장소 여건 때문에 편하게 잠을 청할 수 없었다. 제이시는 로비에 배치된 넓은 의자에서 자다가 깨서 바로 윌에게 다가와 힘들어하는 그가 안쓰러웠는지 조금은 휴식을 취하길 권했다. 그러나 윌은 몸은 피곤했지만 어제 하루 동안 쌓인 죄책감 때문에 잠을 자도 쉽게 이루지 못할 거라고 정중히 거절했다.
다른 일행들도 한 명씩 기상해 다 일어난 직후에 바로 앞으로의 계획을 의논했다. 간밤에 빌리도 필요한 응급처치를 끝내서 급한 불은 껐기에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의 발목을 붙잡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우선 병원 안을 조사해볼까. 다들 허기졌을 테니 먹을 거부터 찾아보자고.”
“그럼 팀장님은 그때라도 좀 주무시고 계세요.”
“글쎄 난 괜찮다니까.”
“못 먹는 거만큼 힘든 게 못 자는 거예요. 일 있으면 깨워드릴 테니까 어서 주무세요.”
제이시가 끝까지 입장을 고수하자 윌은 못이기는 척 받아들이고 의논이 끝난 후 바로 의자에 누워 잠을 청했다. 다른 사람들은 먹을 걸 찾아 나서거나 이 병원 안에 혹시 있을지 모르는 생존자를 찾으려고 동분서주했다. 캐서린과 빌리는 병원 내 매점을 찾아 그 안에서 당장 먹을 수 있을만한 음식을 챙겼다. 꺼진 냉동고 안에 보이는 냉동 햄버그 스테이크 같은 것들이 눈길을 끌었지만, 지금 전기가 나올 리가 전무하니 그림의 떡이었다.
“피를 너무 흘렸더니 더 배고픈 거 같네.”
“여기서 나가면 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선배.”
“그럴까? 그럼 니가 사는 거다?”
“네에?! 말도 안 돼요!”
어려운 상황에서도 둘은 한시라도 쉬지 않고 평소처럼 티격태격 다퉜다. 절망적인 순간에서도 발하는 하나의 희망이 그들을 절대 굴하지 않게 해주는 버팀목이었다.
앤리사는 2층에 있는 병실부터 돌아다니며 생존자 수색에 나섰다. 병실 문은 전부 열려 있어 일일이 열어볼 필요도 없었지만 병실 안에서 무언가 튀어나오진 않을까 무서워 입구에 가까이 가지는 못하고 복도 가운데에서 대충 안쪽을 살피기만 했다. 2층은 아무리 돌아다녀도 사람은 커녕 먹다 흘린 감자튀김 조각조차도 보이질 않았다. 2층 수색을 끝내고 3층을 올라가 첫 병실을 확인하는데, 다른 병실과는 달리 가림막이 쳐져있는 침대가 있었다. 커튼 뒤로 누군가 있는 듯이 사람 모양의 윤곽이 드러나서 앤리사는 조금씩 병실로 진입했다.
“거기 누구 있나요...?”
조심스레 말을 걸어 확인하려 했지만 대답이 없어 계속 침대에 다가서는 앤리사. 커튼 바로 옆에 다가서서 살살 커튼을 걷고 보니 침대에 누워 잠을 자는 듯한 여성과 그녀의 손을 잡고 의자에 앉아서 선잠을 자고 있는 남성이 있었다. 죽었나 싶었지만, 자세히 들어보니 숨소리는 확실히 나고 있었다. 근처에 다른 누군가가 온 것에 놀라 잠에서 깬 남자는 옆에 서 있는 앤리사를 보고 화들짝 놀라고 만다.
“누, 누구시죠!?”
“예?! 아...저는 그냥...혹시 누가 있을까 해서 찾아보러 왔어요!”
앤리사도 덩달아 놀라 말을 버벅이고 얼떨결에 여성이 누워있는 침대 머리맡 상단에 써진 팻말을 보았다.
“아이리스...베스퍼?”
베스퍼....베스퍼.....어디서 들어봤는데...친근한 성인데 갑자기 떠오르지 않다가 팟!하고 생각난 그 이름.
“테린!”
“테린...? 딸과 아는 사이입니까?”
“네? 딸이요? 그럼....”
테린이 자신의 딸이라고 하는 그 남자는 앤리사에게 자신이 테린의 아버지이며 이름은 브라운 베스퍼라고 했다. 옆에 누워 있는 여성은 보다시피 자신의 아내라고 소개했다. 일어나서 직접 인사할 순 없었지만. 앤리사는 그제서야 자신을 테린의 친구라고 정식으로 소개하고 둘이 여기서 계속 있었던 이유를 물었다.
“다른 병실엔 아무도 없었는데, 여기에 계속 계신 거예요?”
“아...다른 사람들은 모두 피난을 간 모양이야. 하지만 난 그럴 수가 없었지.”
말없이 누워있는 아내의 손을 더욱 굳게 잡으며 그는 억지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내가 누워있는데, 같이 데려가기도 그렇고 해서 그냥 여기에 있었지.”
혼자 가거나 가지 못할 바엔 차라리 둘이 같이 있는 편이 낫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여 끝까지 아내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있던 브라운은 앤리사에게 딸의 행방을 물었지만, 앤리사는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지난밤에 마지막으로 본 친구의 모습이 떠올라 소름이 끼쳤지만 어떻게 됐다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설마 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걱정이 들어 초조해지는 브라운. 아내의 손을 방금 전보다도 더욱 굳게 잡는데, 그의 손을 누군가가 위로 덧잡는 것이 아닌가. 고개를 돌려 침대 위를 보는 브라운과 그 광경을 본 앤리사는 모두 놀라워했다.
“...여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