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지하의 연구시설. 흰색 가운을 입은 연구원으로 보이는 두 명과 그와 달리 깔끔한 정장차림을 한 남자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를 걸어가며 이야기를 나눈다. 연구원 한 명은 젊고 유능해 보이는 남성이었으며 다른 한 명은 그 보다 나이가 꽤 많아 보이는 중년의 남성이었다. 그들은 정장 차림의 남성에게 자신들의 연구 성과나 앞으로의 개발 계획 등을 보고하는 듯 보였다.
“아직 완성단계에 다다르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곧 시제 샘플을 입수할 수 있을 겁니다.”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이제 협력사에서 우리 연구 결과를 보러 올 테니 조금 더 신경 써 주세요.”
“알겠습니다.”
두 연구원의 앞에 걸어가던 정장 차림의 남성이 복도 끝 문에 도착하고 젊은 연구원이 그의 카드키를 꺼내 문의 잠금을 해제하여 들어갔다. 연구실에 들어가자 젊은 연구원이 탁상 위에 놓여져 있는 보호상자에 들어있던 캡슐을 꺼내 중년 연구원에게 건넸다. 중년 연구원은 그것을 받아들고 정장 차림의 남성에게 다가가 조금 기대하는 표정으로 그의 앞에 내밀었다.
“어때? 아름답지 않나? 이것이, 우리가 그토록 원하던 이상의 결실을 맺게 해줄 걸세.”
“오래 기다린 보람은 있겠군요.”
“다 자네가 도와준 덕이지. 이것으로 인류는 진보할 수 있어!”
중년 연구원은 자신이 생각해도 벅차오르는지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몇 년에 걸친 시행착오로 난관에 부딪쳐 절망하기도 했지만 마침내 제대로 된 결과물을 볼 수 있는 희망이 생겼으니 누구도 웃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정장 차림의 남성은 반대로 웃기는커녕 입가가 슬슬 일그러지더니 치밀어 오르는 화를 억누르듯 해 보였다. 중년 연구원은 그런 그를 보곤 웃음을 멈추고 물었다.
“자네, 갑자기 왜 그러나?”
“우리 프로젝트가 고작 그런 시시콜콜한 데에 쓰여서야 되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우리의 연구 목표는 오직 ‘인류의 올바른 진보’일세! 시작할 때부터 오로지 인류를 위해 연구하겠다고, 자네와 내가 깊이 맹세했잖은가!”
“아~그랬죠. 그렇게 시작했죠. 그런데.......제가 그 때 왜 그랬는지 지금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정장 차림의 남성이 말을 끝내자 연구실 문이 열리고 밖에서 총기를 든 용병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곧바로 그 안에 있던 연구원 모두를 각자 한 명씩 겨냥했고 갑자기 일어난 사태에 중년 연구원과 그 연구원들은 매우 당황해했다.
“자...자네 지금...무슨 짓인가!!”
“보고도 모르십니까? 일을 끝내려고 하는 겁니다.”
그가 손짓을 한 걸 신호로 용병들은 바로 방아쇠를 당겨 잔인한 학살을 개시했다.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연구원들은 밖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이미 문에 잠금이 걸려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개죽음을 당하기 시작했다. 그걸 보고 있던 중년 연구원은 아연실색하여 그들을 막으려 했지만 소용없었고, 곧장 정장 차림의 남성에게 다가가 그의 멱살을 붙잡고 항의했다.
“당장 멈추게!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네!!
“지금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 모르시는 것 같군요.”
“당장 멈추라....커흑!!”
거세게 항의하던 그가 말을 말고 배를 움켜잡으며 쓰러졌다. 정장 차림의 남성의 손엔 권총이 들려있었고 총구에선 연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바닥에 누워 배에서 피를 쏟고 있는 그는 아까의 기쁜 표정은 어디가고 분노로 가득 찬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성을 노려보았다.
“네...네 이놈...알레그로 그레엄...! 잘도 이런 짓을...!!”
“당신과 당신네 연구원들에겐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건 감사의 뜻으로 드리는 선물이니 저세상 가는 길 기쁜 마음으로 가십시오. 아, 연구결과 보고서에 이름을 올리는 정도는 해드리겠습니다.”
“이....이 짐승만도 못한.......꺼윽....”
중년 연구원은 빠르게 진행되는 출혈에 숨을 거두고 알레그로라 불린 남성은 총을 집어넣고 미련 없이 뒤돌아 문을 나가려 했다. 문을 나가기 직전 용병 한 명을 불러 그의 곁으로 오게 했다. 그는 중년 연구원 옆에서 누워있는 같이 들어왔던 젊은 연구원을 가리켰다.
“저기 있는 놈 데려다가 다음 연구원들에게 실험체로 쓰게 해.”
보통 사람은 생각지도 못할 지시를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내리곤 그는 문을 나섰다. 용병들은 연구실에 즐비한 시체들을 치워 다음 연구원들의 연구를 위한 준비를 했다.
알레그로는 자신의 사무실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조금씩 새나오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오직 자신의 이익 때문에 자신을 믿었던 사람을 배신해 죽였다는 죄책감은 애초에 없었다. 자신의 야망은 이제 시작이며 세상이 자신만의 무대가 될 것을 상상하며 이미 모든 것을 가진 듯 웃어재꼈다.
“이제 누구도 방해하지 못해! 나만의 세상! 오직 나만의 세상이 될 거야! 크하하하하하하!!”
테린은 앤리사가 다친 곳이 있는지 확인했지만 다행히 어떤 곳에도 상처는 없었다. 그녀는 곧이어 아직도 울음을 그치지 못하는 앤리사를 진정시켰다.
“이제 괜찮아. 내가 계속 옆에 있을게.”
계속해서 우는 앤리사를 달래는 그 때, 집 문 밖에서 저벅저벅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사람인가 했지만, 걸음 소리가 마치 다리를 저는 사람의 소리처럼 불규칙하여 왠지 불안해졌다. 앤리사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울음을 그치고 테린의 품에 꼭 안겨 두려움에 떨었다. 테린도 긴장한 채로 권총을 빼들어 문 밖을 겨냥하고 잠시 뒤에 시야에 들어온 것이 사람이 아닌 걸 알고 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탕-탕-탕-!
여러 발이 적중해 뒤로 쓰러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다시 중심을 잡고 걸어오는 괴물에 그녀들은 더욱 겁에 질려버리고 말았다. 아직 탄창에 총알이 남아있었으나, 총도 소용없다고 느낀 테린은 자포자기한 듯 총구를 바닥에 떨구었다.
“꺄악! 오지 마!!”
“젠장...끝인가...”
몇 발자국 남지 않은 괴물과의 사이를 두고 한참 절망하던 차, 맞은편에서 총소리가 울리고 곧바로 걸어오던 괴물이 바닥에 쓰러졌다. 이번엔 바닥에서 꿈틀꿈틀할 뿐 다시 일어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놀라서 판단이 안 되던 테린이 정신 차리고 앞을 보니 경찰관 한 명이 총구를 들고 서 있었다. 마침 주변에서 이 사태를 진정시키려 출동했다가 테린이 쏜 총소리를 듣고 달려온 것이다. 그는 곧장 테린과 앤리사의 곁에 가 그들을 도왔다.
“다들 괜찮습니까!”
“고맙습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어서 나가시죠. 여기 계속 있으면 위험해요.”
테린과 앤리사는 경찰관을 따라 집을 나와 순찰차를 타고 그 지역을 떠났다. 안도의 한숨을 쉬던 그녀들이었지만 순찰차 안에서 바라보는 바깥은 ‘산지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모든 곳에서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고 차량들이 이리저리 어지럽혀져 있었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외견이 흉측한 괴물들이 아직 죽지 않은 사람들을 먹어치우기 위해 달려드는 모습이 곳곳에서 발견되었으며 그로 인해 도시는 쑥대밭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 광경에 한 번은 앤리사가 버티지 못하고 구역질을 하고 말았다.
“대체 왜 이런 일이...”
“지금 멀쩡한 곳이 하나도 없어요. 이대로라면 살아남기 힘들 겁니다.”
테린 일행이 타고 가는 순찰차를 보고 도움의 손길을 청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어쩔 도리가 없던 그들은 무시하고 떠나야 했다. 미안함에 돌아보던 테린은 그 도움을 청하던 사람들이 바로 괴물들에게 공격당해 죽는 모습에 고개를 돌렸다. 자신만 살아남으려 한다는 죄책감과 명색이 경찰관인데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무능력함에 괴로운 것이다. 아무리 능력 밖이라 하지만,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하는 자신이 그녀 생애 처음으로 한탄스럽고 미웠다. 점점 마음 속 깊은 수렁에 빠지는 테린을 운전하던 경찰관이 백미러로 보곤 입을 열었다.
“이미 늦었습니다. 이렇게 된 게 당신 책임은 아니에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짐작이라도 한 듯 경찰관은 그녀가 더 이상 절망에 빠지지 않도록 다독였다.
“하지만....도와줄 수도 있었을 텐데.....”
“우선 우리라도 살아남아야 합니다. 다른 건 살고 나서 생각하세요. 그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의 말 한마디에 테린은 바로는 아녔지만 점점 기운을 되찾아 눈에 생기가 돌았다. 앤리사도 덩달아 마음을 굳게 먹게 되었으며 정작 위로를 해준 경찰관은 아무렇지 않게 계속 운전을 했다.
어느 새 경찰서에 도착해 테린과 앤리사가 순찰차에서 내리고 경찰관은 차창을 내려 그녀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전 다른 곳에 가서 최대한 도와줄 사람들을 찾겠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그럼 두 분, 꼭 살아남으십시오!”
순찰차는 다시 바퀴를 굴려 떠났고, 테린과 앤리사는 경찰서 정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나 조금 전부터 느껴지는 고요함에 이상함을 느껴 쉽게 발이 떼어지지 않았다. 혹시, 경찰서 안에 무슨 일이...? 불안감이 엄습해 들어가기 꺼려지지만 더는 돌아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마당을 지나 건물 출입문을 열었다.
“이...이게 뭐야...”
조용했다. 어떠한 소리 없이 그저 정적만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안은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바닥과 벽, 책상, 심지어 창문에 혈흔이 이리저리 묻어있고 서류 뭉태기와 전화 수화기가 아무렇게나 어지럽혀져 있는 모습은 폭풍이 지나간 것 같이 난장판이었다. 그 주변엔 이 경찰서 소속인 경찰관들의 시체들이 먹다 남긴 사과처럼 찢어진 옷 안으로 살갗이 여기저기 떨어져 나가있었으며 주로 목이나 손목, 어깻죽지가 그러했다. 그 중에는 강력계 형사들도 섞여 있어 테린의 감정은 더욱 북받쳐 올랐다.
“말도 안돼...”
아까까지만 해도 같이 숨 쉬며 살던 사람들이 몇 시간 만에 싸늘한 주검이 되어 마주하게 된 상황이 도무지 믿겨지지 않았다. 같이 일하고, 같이 웃고 떠들던 사람들을 잃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눈앞에 보이는 이 현실은 그녀에게 있어 매우 날카로운 화살과도 같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 테린은 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눈에 들어오는 건 없었지만.
“대체.....어째서....어째서 이런....!”
앤리사도 놀라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경찰서까지 이 지경이라면 지금 상황은 엄청 심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여러 명으로도 막을 수가 없는 사태를 소수인 그녀들이 무슨 수로 해쳐나갈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생각하면 할수록 막막해지니 이쯤 되면 생각하기를 포기하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테린은 다시 한 번 정신을 차리고 혹시나 있을 생존자를 찾기 위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우선...살아있는 사람이 있는지 찾아보자.”
“뭐? 싫어! 난 무서워!”
테린과 달리 앤리사는 난생 처음으로 사람이 흘리는 피를 본 것이고, 그것도 수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죽어서 나온 피와 시체들을 본 것이기에 가끔 과격한 작업으로 인해 그나마 익숙해 있던 테린보다도 심하게 겁에 질려있었다. 그 때문에 이 끔찍한 장소에 있는 게 마치 더는 없을 악몽과도 같았고 그런 악몽 속에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 죽으러 가는 것이라 생각한 그녀는 테린의 결심에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겁나는 거 알아. 나도 지금 무서운데 너라고 안 그러겠어?”
“그걸 알면서 왜 가겠다는 거야...! 안에 뭐가 있을지 모르잖아!!”
“모르니까 가려는 거야. 살아있는 사람이 아직 남아있을 수도 있으니까...만약 있다면 그 사람들과 같이 이곳에서 바로 나가자.”
테린은 곧바로 경찰서 안쪽으로 들어가려는데 앤리사가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저지했다. 자신이 들어가는 것도 무섭지만 친구인 테린이 들어갔다가 무슨 끔찍한 일을 당하게 될까하는 걱정도 컸다.
“안 돼! 들어가지마! 제발 들어가지마!!”
“너 정말...”
“우리 그냥 나가자...나가서 찾으면 되는 사람을 왜 여기서 찾으려 그래! 나 여기 있다가 정말 죽을 거 같단 말야...!”
한창 둘이서 실랑이를 벌이던 때에, 홀에서 오른쪽 방향에 있는 안내 데스크 쪽에서 덜그럭 거리는 소리가 들려 테린은 바로 총을 들고 그쪽을 겨냥했다. 아무도 없을 거 같은 곳에 기척을 느끼는 건 그다지 좋은 소식은 아닌 걸 아는 그녀는 크게 긴장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그리고 잠시 뒤에 데스크 위로 모습을 드러낸 건 신고 접수처에서 일하는 캐서린과 그 상관 빌리였다.
“캐서린...? 빌리?!”
“테린!? 너 무사했구나!”
“테린 선배! 살아계셨군요!”
이런 절망 가득한 상황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을 찾은 듯한 기분으로 그들은 서로 다가가 재회의 기쁨을 나눴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나도 무사히 만나서 반갑다. 딱히 좋은 시기는 아니지만...”
“너희들 말고 다른 사람들은...?”
“아니...여기에서 살아남은 건 아무래도 우리 둘 뿐인 거 같다. 다른 인원들은...보다시피 모두 살아남지 못했나봐...”
“저희는 접수처 문을 책상이랑 의자로 막아놓고 상황이 끝나기만 기다렸어요. 너무 무서워서...일단 살고보자는 식으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캐서린은 이제까지 너무 놀라서 나오지 않던 눈물이 왈칵 쏟아지며 울먹울먹 울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를 테린은 안아주며 달래주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자신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공감한 듯 마음껏 자신의 품을 흐느끼는 캐서린에게 빌려주었다.
“근데 너희는 이제 어쩔 생각이야?”
“음...그게....사실은 나도 지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이런 상황에서 바로바로 뭘 해야 할지 대책을 딱딱 세운다면 그게 제정신이 아니지...서로 말은 안했지 둘은 같은 생각을 하며 끙끙 앓았다.
“크르릉...”
머리를 맞대고 고민을 하는 테린의 뒤쪽에서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불안한 마음으로 고개를 돌려 그쪽을 보는데, 강력팀 사무실에서부터 나는 소리가 커지다가 멈췄지만, 개가 걷는 소리가 이어서 들려오면서 사무실을 나와 그 소리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르르릉...!”
찢어진 입가 사이로 이빨을 드러내며 절대 서 있을 수 없는 몰골로 천천히 나온 그것은 입 말고도 군데군데 살이 찢어져 피로 범벅된 개였다. 눈은 눈동자가 없이 탁한 흰색이었다. 문제는 그런 개가 한 마리도 아닌 세 네 마리가 동시에 나와 일제히 테린 일행을 노려다봤다.
처음엔 너무 당황해서 다들 멍하니 있다가, 테린이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뛰어!!”
테린이 앤리사와 캐서린을 경찰서 계단 쪽으로 밈과 동시에 다같이 뛰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가만히 노려보고만 있던 개들도 짖으면서 그들을 쫓기 시작했다. 개들의 이동경로에 책상, 의자 등등의 장애물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뚫린 길로 달리는 테린 일행을 빠른 속도로 거리를 좁혔다. 몇 발자국 밖에 안 되는 거리가 되자 개들은 좀 더 속력을 내 먹잇감을 포획하려 달려들었다. 일행보다 조금 뒤에 떨어지던 앤리사에게 개 한 마리가 달려들자 앞에 있던 빌리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진압봉으로 달려들던 개의 머리를 세게 쳐 멀리 날려버렸다. 잠깐 사이에 일어난 일로 멍해 있는 앤리사를 빌리가 빨리 낚아채 다시 달리게 해 더는 뒤처지지 않게 했다. 그렇게 달리다가 3층 복도 중간에 위치한 통제실로 가 문을 걸어 잠그고 개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필사적으로 막았다. 성하지 않은 몸이지만 문에 몸을 날려 육중한 무게를 이용해 계속 부닥쳤지만 소용이 없자, 개들은 포기했는지 발길을 돌려 다른 곳으로 향했다. 테린 일행은 밖이 조용해진 걸 확인하고 한숨 돌렸다 생각했는지 그 자리에 바로 주저앉았다.
“이젠 개들마저...”
“정말 위험했어.”
서로 다친 곳이 없나 확인해주고 통제실을 둘러보는데 비교적 이곳은 다른 곳보다 깨끗했다. 뭐가 숨어있는가 없는가하는 걱정은 안 해도 될 거라고 결정, 일행은 잠시 이곳에서 앞으로 어떡할지 의논해 보기로 한다.
“설마 개까지 저런 꼴로 변할 줄이야...”
“대체 뭣 때문에 이렇게 된 건지 모르겠어요...”
“이거 어쩌면...?”
골똘히 생각하던 빌리가 뭔가 떠오른 듯이 일행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뭔가 짐작 가는 거라도 있어?”
“꽤 허구적인 얘기지만 말야...너희들, 좀비 영화 한 번이라도 봤냐?”
“...좀비?”
“영화에서 사람이 죽어서 좀비로 변하면 보이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려고 달려들거든. 지금 밖에 돌아다니는 것들 보면 좀비하고 딱 맞잖아.”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이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매우 말도 안 되는 상황이란 얘기인데...빌리의 말이 맞지만 일행 중 바로 납득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란 편견 때문인지, 현실을 애써 부정하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평소에
“그럼, 그 좀비가 되는 원인은?”
“바이러스에 노출된 좀비에게 물리면 그렇게 되는데, 지금 좀비들이 나타난 이유가 바이러스 때문인지 아닌지 확실하지가 않아서 확신을 못하겠다...”
들으면 들을수록 기가 막히는 얘기에 넋을 잃고 있던 테린은 조금이라도 있을 가능성 때문에 섣불리 움직일 수가 없다는 생각에 답답함을 주체 못하고 자리를 벅차며 일어났다.
“어떻게든 빠져나가야 하는데...”
“그러려면 우선 경찰서 옥상에 있는 헬기장으로 가보는 게 나을지도 몰라.”
헬기장으로 가는 길은 아까 올라왔던 계단에서 더 올라가면 옥상으로 통하는 문이 나오기 때문에 가는 건 쉽다. 하지만 같이 올라온 좀비개들이 아직 남아 있을지도 몰라서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들 나가기 꺼려하고 있는 그 때, 갑자기 빌리가 갖고 있는 무전기에 잡음이 강하게 섞인 소리가 들려왔다. 너무 심한 잡음에 잘 들리지 않는 무전은 점점 누군가의 목소리인지 알 만큼 선명해졌다.
“빌리! 무사하냐, 빌리!”
그웬의 목소리였다. 아까 경찰서에서 나왔을 때부터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웬의 목소리가 무전기를 통해 흘러나오자 테린이 누구보다도 더 빠르게 빌리의 허리 왼쪽에 걸려있는 무전기를 빼들어 무전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그웬? 다행이야, 무사해서!”
“테린! 너도 있었구나! 나도 너희들이 무사해서 다행이다!”
그웬의 목소리로 봐선 그다지 나쁜 상태는 아니었다. 여지껏 잊고 있었지만 테린은 그래도 다시 목소리를 들으니 평소에는 없던 반가움이 들었다.
“그나저나 지금 어디에 있는 거야?”
“지금 서장실에 있어. 경찰서 안에도 망할 놈들이 잔뜩 있어서 나갈 수가 없어. 마침 여기에 서장님도 계시니까 너희가 이쪽으로 오면 다같이 헬기장으로 나가는 게 좋을 거야.”
서장도 같이? 서장의 ‘서’자만 들어도 치가 떨리는 테린이었으나 그렇다고 그웬을 두고 갈 수는 없으니 테린은 그 의견에 동의하여 서장실로 향하기로 한다.
“좋아. 우리가 그쪽으로 갈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잘 됐어. 아, 그리고 한 가지. 아까 우리가 데려온 여자애 있지? 걔도 같이 있으니까 걱정은 말라고.”
잠시 무슨 말인지 몰랐으나 금방 누구인지 기억해낸 테린은 무전을 마치고 모두 통제실에서 나가기로 한다.
“괜찮겠지...?”
“장담은 못하지만 괜찮을 거야.”
“그거 아~주 위안이 되는군.”
수 없이 걱정하는 앤리사와 옆에서 비아냥거리는 빌리 덕에 여러 가지 신경 쓰이지만 문 밖 주변을 봐선 좀비개들은 이미 떠나고 없어 보였다. 이 틈을 타 일행은 잽싸게 빠져나와 계단을 통해 4층 끝에 있는 서장실로 빠르게 이동했다. 서장실의 문을 천천히 열고 들어가 기다리고 있을 그웬을 찾았지만 사람은커녕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의아해 하는 테린이 말을 다하기가 무섭게 서장의 책상 뒤에서 창문을 향하던 의자가 저절로 돌아 테린 일행 쪽을 보는 채 멎었다.
“드디어 오셧군.”
의자에는 경찰서장이 그토록 좋아하는 담배를 물은 채 웃으면서 일행을 맞이했다. 한 손에는 권총을 쥔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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